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4> 5. 두 서울 사이, 길목 (2) 젊은 선비들이 보지 못한 것, 장단곡과 화석정
수정 : 2020-06-05 09:39:24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14>
5. 두 서울 사이, 길목
(2) 젊은 선비들이 보지 못한 것, 장단곡과 화석정
채수와 성현 등이 개성을 다녀온 지 한 달여가 지난 4월25일 또 다른 선비들이 개성을 찾는다. 유호인, 신종호, 양희지. 모두 채수와 함께 사가독서하던 동료들이었다. 이중 유호인이 개성여행기를 남긴다. 이들의 여정은 앞선 선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성현의 별장인 장포에서 하루를 묵고 낙하나루를 건넌 채수와 달리 임진나루를 건너 개성을 향한다. 유호인의 여행기에 이 노정이 간략히 나타난다. 여행을 떠나는 날은 가뭄 끝에 비가 내렸다. 감악산 쪽에서 세상을 흔드는 듯한 비가 몰려왔다. 빗속의 강나루엔 정자가 하나 있었다.
“나루에 정자가 있어 올라가 길게 휘파람을 부니 여운이 나뭇가지에 은은하였다. 임진을 지나서 수십 리를 가도록 비가 그치지 않아 감당하기 어려웠다.(유호인. 「유송도록」 중에서)”
나루를 건넌 이들은 개성에서 백여 편 시를 얻어 돌아왔다. 대부분 명승에 대한 감상을 담고 있다. 고려는 이미 옛일이고 살아있는 것은 산천경개였다. 궁궐은 무너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열흘 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임진의 하류 낙하를 건넌다.
“가을 물 맑고 맑아 하늘 함께 짙푸른데/ 우리 임금 가일에 누선 오르셨네/ 사공은 장단곡을 부르지 마소/ 지금이 바로 조선 나라 제이 년이네(정도전. 「임금을 모시고 장단에 노닐며 짓다」)”
정도전의 시다. 조선이 창업한 지 2년이 지났다. 그런데 임진강 나루에선 고려를 사모하는 장단곡이 울려왔다. 산간오지도 아니고 도성 밖 지척의 나루에서 말이다. 장단곡은 태조 왕건을 칭송하는 고려가요. 세상의 변화를 분별하지 못하는 백성을 보며 정도전은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젊은 선비들이 찾아온 오늘, 임진강 사공은 장단곡을 부르지 않았다.
“강에 봄이 드니 강물은 쪽빛처럼 맑고/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노를 젓는 사공은 날아오르는 포말에 옷이 젖는다.(조위. 「임진」 부분)”
앞서 채수와 동행한 조위의 시다. 정도전의 노래는 1393년, 젊은 선비들의 발걸음은 1477년이다. 80년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5백년을 이어온 노래가 사라졌다. 강물은 변함없이 맑았지만 장단곡은 들리지 않았다. 사공은 노만 저을 뿐이다. 길손도 풍경에만 관심을 둘 뿐 인간사에 대한 감흥은 표현하지 않는다.
사라진 것 뒤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유호인 일행이 올랐던 나루터 정자는 화석정임에 분명하다. 이들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을 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이 임진강 정자는 율곡의 5대조 이명신에 의해 지어졌다. 이때를 1443년으로 보고 있다. 다시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름을 화석정으로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여행하기 몇 해 전에 화석정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직 화석정이란 현판은 걸기 전이다. 이름이 없었거니와 화석정은 산천경개의 한 점일 뿐 그 자체로 도드라진 무엇은 아니었다. 선비들은 휘파람만 남긴 채 화석정을 비껴간다. 이때 이후로, 정확하게는 율곡이 등장한 뒤로 이 길목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화석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가 된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일이다.
율곡은 시대를 창업기, 수성기, 중쇠기로 구분했다. 이에 따르면 사가독서하던 젊은 선비들의 시대는 그야말로 뭐든 안 되는 것이 없는 수성기에 해당한다. 장단곡이 불리던 창업기의 혼란이 종료되고 안정을 구가하던 시절이다. 고려를 노래한 장단곡을 잊을 만큼 조선은 달려왔다. 그러나 화석정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조선이 완숙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다. 선비들은 지금 그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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